범신론 자료 - 자연과 초자연(발췌) The Light Of Day

(전략)

 초기 교회의 교부는 기독교적 관념을 자연에 관한 지식과 조화시키려고는 절대 시도하지 않았을 것이다. 오늘날의 사람과는 달리, 그런 조화에 대한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신앙이 현세의 질서에 기반하지 않았다는 점, 과학 및 "자연학자"와 결부된 그 어떤 것과도 관련이 없다는 점을 귀히 여겼다. 현세의 질서는 속되고 악으로 가득하며, 현세와 성스럽고 신적인 것 사이에는 넘을 수 없는 간극이 있다고 믿었다.


아주 훌륭하고 신실한 사람의 대다수는 여전히 자신들의 신앙에 대해 이처럼 생각한다; 평범한 일이 자연적으로 벌어지는 방식과는 아무 관련도 없으므로 믿음은 더욱더 성스럽고 귀중하게 느껴지는 것이다. 그들에게 신앙은 인생의 단조로움, 실패, 물질주의에서 벗어나는 길이었다. (...) (그런 믿음이) 그들을 구원했다; 왜 우리는 구원해주지 못하는가? 그 이유는 단순하다; 우리가 더는 그런 믿음을 신뢰할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 세대는 다른 세상에 태어났다; 아무리 애써본들 지난날의 교리를 더는 믿을 수 없다. 과거 우리 조상의 지식수준에는 알맞았지만, 우리에게는 더는 적합하지 않다. 오래된 용어와 표상(역주: 원문은 sign, 기독교에서 신이 자신을 나타낸 신호)은 윗세대를 만족시켰지만, 우리가 받아들이기에는 빠르게 낡고 도태되고 있다. 우주의 모든 측면이 바뀌어버렸다. 그러나 우리의 구원은 여전히 우리 아버지 세대와 사실상 같은 조건을 만족시켜야 한다 - 즉, 우리가 진실이라고 보고 느끼는 바에 충실해야 한다는 점이다. 

 뉴먼 추기경에 따르면, "진지한 이 중에서 자기의 종교적 믿음에 대한 어떤 합리적 근거가 없어도 편안히 있을 자는 드물다." 그러나 모든 연령대에서 인구 대부분을 차지하는, 정신이 미완성되고 미성숙한 이들은 자신들의 신앙을 이성이라는, 너무나 평범하고, 너무나 세속적인 것에 비춰보는 짓은 되려 피할 것이다. (...) 받들 이상도 없고, 만사의 아름다움과 적합함에 대한 어떤 통찰도 없는 대중은 일상의 지루함과 상스러움, 단조로움으로부터 벗어나, 신성한 것, 성스러운 것, 구원해주는 것, 환상적인 것, 기적적인 것, 이성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것을 찾는다. (...) 평균과 익숙함에서 신성과 도움 됨을 찾아내는 것, 어떤 초자연적 장치의 도움 없이도 종교를 찾는 것, 영적이고 영원한 삶을 지금의 인생 안에서, 또 그 인생을 살아가며 발견하는 것은 - 다시 말해, 저속하고 지루한 지구를 하늘에 뜬 별 중의 하나로 보는 것은, 앞서 언급한 다른 모든 것과 마찬가지로, 가장 배우기 어려운 교훈임이 분명하다. 

 그러나 우리는 머지않아 배우게 될 것이다. 이 세상은 악마가 아니라 신의 작품이며, 자연의 질서를 통해 영원한 존재(the Eternal)의 섭리를 발견할 수 있음을 깨닫는 때가 반드시 온다; 사실, 신은 지금 여기, 가장 사소하고 익숙한 사실에 존재하며, (...) 언제나 그랬듯이 쉼 없이 활동하고 있다. 이와 같은 지각은 오늘날 과거 그 어떤 때보다도 더 많은 사람의 의식에 나타나고 있다. 이는 신의 현대성, 영감(역주: 원문은 inspiration으로, 기독교에서 신이 인간에게 주는 감화를 뜻함)의 현대성, 종교의 현대성에 대한 지각이다; 지금 주어진 것 이상의 계시가 있었던 적은 여태껏 없었고, 지금보다 기적이나 표상, 경이로움이 많았던 적은 없었다. 에덴의 정원도, 아담의 타락도, 시나이의 천둥(역주: 출 19:19 나팔 소리가 점점 크게 울려 퍼지는 가운데 모세가 하느님께 말씀을 올리자 하느님께서 천둥소리로 대답하셨다.)도, 보좌하는 천사도 지금 있는 것 이상으로 있었던 적이 없었다. 사실, 이런 일은 역사적인 사건이 아니라 인류가 발달하는 과정에서 끊임없이 재생산되거나 전형화된 내적 경험과 지각이다. 이것이 바로 오늘날의 복음이다; 이게 바로 오늘날 필수적이고 기초적인(formative) 단 하나의 종교 사상이다. 

 이런 지각에 완전히 눈뜬 정신은 창조의 이원성, 또는 신과 세계의 대립이라는 사상에 더는 만족할 수 없으며, 자기의 종교적 믿음과 자연에 대한 지식이 조화를 이뤄야만 마음의 평안을 얻을 수 있다. 둘은 서로 적대적일 수 없다. 우리가 희망하는 것, 우리가 염원하는 것은 우리가 아는 것과 일관성이 있어야 한다. 분명히도, 신앙과 과학은 반드시 같이 가야 한다. 종교는 인류의 구원을 위한 기적적인 계획이 역사에 삽입된 것이라는, 인간이 실행하는 데 실패한 신의 본디 계획이라는 개념은 과학이 밝혀주는 창조물의 통일성과 일관성에 의해 완전히 무너지고 전복되고 만다. 

(...)

 내가 여기서 종교의 실재성을 논박하고 있다고 섣부르게 결론짓지 말기 바란다; 나는 단지 마법과 기적의 실재성만을, 기독교를 인류 역사에 삽입된, 인간의 구원을 위한 계획으로 보는 관념만을 논박하고 있다. 영적인 삶은 인간의 자연적인 능력의 발전만으로는 절대 불가능하고, 없던 것이 덧붙여진 것이며, 그리스도의 삶과 죽음으로 인간에게 가능해졌으며, 그 이전에는 전혀 불가능했던, 유일하고 특별한 종류의 삶이라는 관념을 반대하고 있다. 그런 관념에서는 영적인 삶은 인간 고유의 자연적인 특성이 진화한 결과물이 아니다; 그와는 완전히 반대 방향에서, 외부적으로 주어진 것이고 보충적인 것이다. 앤도버(역주: 매사추세츠주의 신학교)의 박사들에 따르면, "기독교는 외부 우주로부터도, 인간의 구성체로부터도 나오지 않았으며, 오직 그리스도로부터만 유래한, 신에 관한 지식의 원천이다." 종교는 여전히 신이 인간에 대해 세운 계획을 실행하는 데 생긴 어떤 문제나 실패를 교정하기 위한 기적적인 계획으로 간주한다. 인간에게 본질적으로 낯선 것으로, 본래 인간에게 없었다가 훗날 이식된 것으로, 그의 덕성과 선을 행하는 자연적인 능력에는 전혀 연관되지 않은 것으로 여겨진다; 그런 관점에 따르면, 무고한 사람도 종교 없이 살고 죽을 수 있으나, 살인자도 삶의 마지막 순간에 교수대에서 일명 신앙과 회개라는 행위를 통해 종교를 얻을 수 있다! 나는 그런 사고에 반대하는 방향으로 주장하는 중이다; 나는 종교적 감성은 모든 시대와 지역에 동일했으며, 마치 애국심이나 충성심이 그랬듯이, 그 외적인 형태만 달랐을 뿐, 내적인 본질은 다르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어떻게 이성적인 사람이 플라톤, 제논, 에픽테토스, 키케로, 루크레티우스, 스피노자, 또는 다윈의 사상을 헛되이, 단지 사탄의 꼬임으로 치부할 수 있겠는가? 인간의 영적 본질의 개화는 장미나 나팔꽃이 피는 것만큼이나 자연스러우며, 진화의 엄밀한 한 과정이다. 그러나 여기에는 차이가 있다: 식물은 반드시 알맞은 환경, 빛, 온기 따위가 필요하나, 인간의 개화는 가장 불리한 주변 환경에서도 종종 일어나며, 종교적인 영역 못지않게 지적인 영역에서도 그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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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틀림없이, 종교는 어떤 것에 대해서는 과학보다 더 친밀하고 개인적인 방식으로 알고 있다; 시도 그러하고, 문학도 그러하다; 그리고 과학은 왜 이러한가를 알 수 있다. 우리가 감정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이성으로 감지할 수 있는 것보다 더 필수적이고 가깝게 느껴진다. 예수에 대한 깊은 사랑에 눈뜬 사람은 외부의 관찰자가 알 수 있는 것 이상으로 예수를 알게 된다; 그의 영혼은 그리스도라는 개념을 획득하며, 다른 이에게서 일어나는 것 이상으로 그리스도로 채워지고 그에 의해 변화된다. 그렇게 얻어진 지식은 이제는 진실한 앎은 아니지만, 더욱 필수적인(vital) 지식이다. 단지 확신인 것이 아니라, 끌림이고 소속감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는 예수에서만 그런 것이 아니다; 우리 경험의 모든 측면이 그러하다. 꽃이나 새, 또는 나무가 관찰자에게 어떠한 감정도 일으키지 못한다면, 그가 과연 진정으로 그러한 대상을 알게 될까? 우리가 어떤 작가를 사랑하지 않는다면, 그의 가장 깊고 소중한 의미에 닿을 수 있을까? 따라서 괴테는 말한다: "우리는 우리가 사랑하는 것 외에는 알지 못한다." 이런 점에서, 과학은 예수, 혹은 신에 대한 사랑이 인간의 삶을 어떤 특수하고 초자연적인 과정을 통해서가 아니라, 보편적이고 잘 알려진 법칙에 따라 변화시킬 수 있음을 깨닫는다; 즉, 우리는 우리가 사랑하는 것을 닮아간다. 우리가 사랑의 감정으로 바라보고 생각하는 모든 것은 어떤 면에서는 우리 자신이 된다. 

(...)

(후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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