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문 by TheLightOfDay

 중앙아시아 옥수스 강 인근에는 등불 바위라는 이름의 유명한 바위가 있었다고 한다. 그 바위로부터는 산비탈 저 위의 동굴에서 유래한 듯한 빛이 나왔다. 현지인은 그 바위를 미신적으로 두려워했으며, 동굴에 사는 어떤 용이나 악마가 빛을 낸다고 여겼다. 최근, 어느 용감한 영국인 여행자가 산을 타고 올라가 그 현상을 조사했다. 빛은 알고 보니 여느 날에 비추는 것과 같은 보통의 빛에 불과한 것으로 밝혀졌다. 동굴은 사실 양쪽이 뚫린 굴이었으며, 바위 반대쪽 입구로 들어와 바위 쪽 입구를 환하게 밝힌 빛이 보인 것이었다.


 이는 전형적인 유형의 사건으로, 이와 비슷한 일은 온 세상에서 지금껏 있었고 지금도 벌어지고 있으며, 특히 인류의 종교적 경험의 영역에서 흔히 발견된다. 이 수필집의 제목 또한 이 사건으로부터 따왔다. 이 책에서 나는 자연법칙의 충분성과 보편성, 그리고 우리의 두려움과 무지, 미신이 종교에 드리운 신비주의의 장막 역시 대부분은 여느 날의 빛에 의해 완전히 걷히거나 대체될 것임을 역설하였다. 

 이 수필은 대부분 12년에서 15년 전에 쓴 것으로, 당시 나는 이런 종류의 주제에 지금보다 더 마음을 많이 쏟고 있었다. 오늘날 보아 그런 글이 문학적, 또는 다른 측면에서 출판에 충분한 가치를 지닌다고 생각되어 책으로 펴내게 되었다. 

 각각의 글은 각기 다른 시대에 다른 일로 쓰인 글이므로, 개중에는 중복되는 부분이 없지 않을 것이다. 각 글을 쓸 때 나는 특정한 마음가짐을 갖고 있었으므로, 그런 경험을 독자 역시 공유하고자 한다면 한자리에 한 단원만 읽기를 권한다. 

 만일 여기서 논쟁의 소지가 될 부분이 있다면, 종교보다는 신학에 좀 더 초점을 맞춘 것이다. 적어도 내가 의도하는 바에 따르면 그렇다. 신학은 사라질 것이다; 반면 우주의 거대함과 신비로움에 대한 경외와 숭배의 감정 또는 느낌으로서의 종교는 남을 것이다. 과거로부터 유래한 신학에 남아있는 매력은 얼마 되지 않으며, 현재의 맹렬한 빛과 격렬한 활동으로 퇴색되어 버렸다. 이제 놓아주도록 하자; 과거의 신학은 이제 우리 몸에 맞지도 않고, 닳아버린 옷과 같다. 인류가 태허(太虛)의 추위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마침내 어떤 옷을 입을 것인지, 혹은 강인해지고 무뎌져서 옷을 입을 필요조차 없어질 것인지는 내가 감히 말할 수 없다. 나로서는 다만 나이가 들어갈수록 어떤 신학적인 믿음이 필요하다는 느낌은 점점 줄어들고, 반면 보이지 않는 힘이 나와 나의 일을 스스로 이끌어 가도록 의문이나 불신을 갖지 않고 놔두는 것에 점점 만족하게 된다. 그 힘이 나를 이곳으로 데려왔으며, 나는 여기에 있는 것에 만족한다; 때가 되면 나를 데리고 갈 것인즉, 나는 그 일 또한 나에게 좋을 것을 의심하지 않는다. 

 우리는 어떤 위대한 수학자가 증명을 위해 시간의 칠판에 그려놓은 도형과 같다. 그에 의해 어떠한 문제가 확실하게 풀릴 것이다; 그게 어떤 문제인가는 도형인 우리가 알 수도 없고 알 필요도 없다; 우리가 아는 것이라고는 우리는 언젠가 칠판에서 지우개로 지워질 것이며, 새로운 도식이 우리의 자리를 차지할 것이고, 증명은 계속될 것이라는 점이다. 

 우리가 어떤 목적을 이루었고, 분명히 나타났으며, 우리의 존재로 인해 무언가가 이루어졌다는 것 - 그것만으로 충분하지 아니한가? 다른 도형과 함께 어떤 역할을 맡아 수행했고, 칠판을 떠남으로써 다른 형태에게 자리를 내주어 더 고귀한 결과물과 더 지대한 영향을 미칠 결론이 담길 수 있도록 하는 것 - 이것만으로 충분하지 아니한가? 

1900년 4월 씀

덧글

  • 채널 2nd™ 2018/11/10 11:35 # 답글

    >> 어느 용감한 영국인 여행자

    대저 영국인들은 없는 곳도 없고 -- 전세계 어디를 가더라도 영국인은 발견된다든가...

    그 와중에 용감함까지 겸비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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